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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RD

#12 인간유지비

Photo by  Mamun Srizon  on  Unsplash

 

 

 

TV를 포함한 많은 어른은 어린 나에게 내가 어른이 될 때쯤엔 다들 100살까지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백세시대'라는 말은 이미 의미가 가슴에 와닿지 않을 만큼 닳아버렸다.
고작 10년을 살았던 나에게 100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고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무엇이든 많으면 좋은 거니까, 세배하고 나면 늘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말을 하도록 교육받았으니까 좋은 건가 보다 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100살까지 살게 된다면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훨씬 많은 나이지만
100년은 허투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달아 가고 있는 나이다.

 

6개월간 치과에 다녔었다.
매번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주로 토요일 오전에 치과를 갔는데 어느 날은 갑자기 억울해지는 것이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토요일 오전에 거금을 내고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서러웠다.
그렇지만 난 어른이니까 차분하게 자신을 위로했다.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난 밥을 먹을 수가 없어.'
'사람은 왜 밥을 먹어야 할까.'
'끊임없이 찾아오는 허기를 달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인가.'

초록색 천을 덮고 입은 활짝 벌린 채 쓸데없는 생각의 꼬리들을 물고 늘어지곤 했다.
그렇게 6개월간의 인내와 텅 빈 통장으로 가짜 치아를 얻게 되었다.

 

처음 가짜 이를 들여놓았을 때는 자꾸만 거울로 확인하고 때때로 혀로 건드려보게 되었다.
원래 자리했던 치아와 비슷한 색상이지만 미묘하게 예쁜 모양으로 자리한 가짜 이와 내외했던 것 같다.
불쌍한 나의 이는 갈려 나갔고 남은 평생은 이 가짜 모형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했다.
삼시 세끼 열심히 양치했지만 썩어가는 이를 막을 수 없었고 이가 썩었다고 내일이 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람은 쉽게 망가지지만 쉽게 죽지 않는다.
이가 썩으면 가짜 이를 박아넣고 살아야 한다.

 

속절없이 낡아가는 이 몸을 100년 동안 아껴 쓰고 고쳐 쓰려면 유지비가 엄청나게 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시간이든 돈이든 간에 말이다.

다치고 망가지는 건 몸 뿐만이 아니다.

마음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꾸준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한다. 

 

나를 보호해주던 울타리가 하나둘 사라져감에 따라 나만의 울타리를 스스로 꾸려놓았다. 

어설프게 세워진 울타리가 비가 내리는 탓에 땅이 물러 맥없이 쓰러지는 날이 있다.

이럴 때는 어서 다시 고쳐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비가 내리고 있으면 비가 그치기 전까지 밖을 나가기가 두렵다.

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비가 나를 위에서 아래로 누르면 그대로 아래로 더 아래로 함께 떨어져 내린다.

세상이 나에게로 무너질 땐 모든 걸 놓고 함께 무너져 내려야 덜 아픈 줄 알았다.

그러나 단시간에 최대한 얉은 곳에서 멈추어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쉽다는 간단한 사실을 왜이리 늦게 깨달았을까.

 

요새는 '회복탄력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한다.

회복탄력성은 크고 작은 다양한 역경과 시련과 실패에 대한 인식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이 뛰어 오르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고 할수있다. 물체마다 탄성이 다르듯이 사람에 따라 탄성이 다르다.

장대비 속에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는 힘.
고개를 들어 비가 내리는 근원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힘.

 

오늘은 눈을 뜰 수 없지만 내일은 고개를 들 수 있도록 마음의 근력을 길러야 함을 늘 잊지 말아야지.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몸도 마음도 새 제품… 은 안 되겠지만 A급 중고품 정도로 유지하는 것이 목표이다.
평화로운 마음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고 지루한 여정 곳곳에 숨어있는 행복들을 찾아내고 

다져진 신체는 그것을 파헤쳐 손에 꼭 쥘 수 있도록 한다.

 

망가졌다고 쉽게 버릴 수 없으니 자주 돌아보며 돌보아야겠지.
나를 포기하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자 가장 어려운 과제인 인생이다.

 

운동은 걸렀지만, 다시 또 의지를 불태우는 하루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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