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를 돌아보면 지난 1년은 검은 터널 속을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것과 같았다.
정체 모르는 커다란 괴물이 내 등 뒤 딱 한뼘되는 거리에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뒤는 커녕 내 옆을 쳐다볼 새 없이 앞이라고 어림 잡히는 방향으로 달려야만 했다.
가장 최초의 원인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이것이었다. 나는 못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현명한 질문하는 법을 몰랐고 그를 통해 배우는 법을 몰랐다.
어느 무리에 있건 늘 중간 이상을 해내왔다.
남들에게 부탁하거나 피해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스스로 발품 팔아가며 남의 시간을 빼앗아 그 사람의 역량을 얻어내는 과정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운 좋게도 기꺼이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함에도 나는 어려웠다.
아마 이 좋은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더욱 어려웠던 것 같다.
나를 귀찮게 여기면 어쩌지,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해서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거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이 무리에서 가장 제 몫을 다 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늘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있었지만 속으로는 당장 재도 남지 않게 연소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와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수월하게 나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내가 잘못된 자리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괜한 고통을 받고 있는 걸까
'인생은 B와 D 사이의 Choice다' 라는 말이 이제서야 내 뒤통수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무한도전의 A vs B 특집을 보면서 그저 깔깔 웃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다시 보면 웃을 수 있을까...
웃을 거 같긴하다. 재밌으니까.
어찌됐든 2020년은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일이 힘든 것보다 그 일을 해내는 과정에 있어서 나의 무력함을 매순간 마주해야 하는 현실과
그로인해 늘 바닥을 절절 기었던 나의 작은 자존감이 안타까웠다.
나름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주인을 잃어버린 마리오네뜨처럼 누군가 손가락을 움직여 방향을 지시해주지 않으면
아무 행동도 생각도 할 수 없는 플라스틱이었다.
뇌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 같다.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냈던 시간들이 그리워진다.
대학 시절, 모든 전공 수업에서 아이디어를 짜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했던 학기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교통카드를 찍으면서도 콘텐츠를 생각했고 잠들기 직전까지 프로젝트 생각 뿐이었다.
가장 바쁘고 치열했던 학기였는데 결과적으로 그 학기에 성적 장학금을 받았다.
그 학기를 마치고 종강하였을 때 뇌가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하루종일 걸어다니다가 하루 끝에 호텔 침대에 스르륵 누워 안으로 스며드는 듯한 편안한 느낌이다.
학창시절 몇 시간 동안 수학 문제를 풀다가 책을 딱 덮었을 때 들던 그 느낌.
이 느낌을 가져본지 참 오래된 것 같다.
긴장을 놓고 살았기 때문일까? 눈 앞의 문제를 쓱싹 처리하기 급급한게 문제일까?
매일 척수 반사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기분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관성이나 타성은 건성이나 비슷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반대말은 '관심'이다.
ㅡ <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그래 나는 관성적으로 살고 있구나.
본문 내용은 언어에 관한 이야기지만 나의 삶도 이와 같다는 걸 떠올렸다.
새로운 것을 마주해도 내가 아는 무언가로 대체하여 받아들이려는 건성적인 태도와
이로 인해 점점 나의 삶에서 관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 관성으로 생활하는 건 에너지를 아낄 수 있기 때문에 이롭다고 옛날에 어느 기사에서 본 적 있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은 그렇게 되도록 뇌가 선택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관성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인생 자체가 관성에 의해 움직인다면,
외부의 자극 없이는 영원히 한 방향만 알고 그 방향으로만 굴러가고 있다면,
그대로 죽음에 골인하게 된다면.
나는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눈이 갖고 싶고
쓸모 있는 의견을 말하는 입이 갖고 싶다.
나의 눈과 입에 자신감을 가지고 싶다.
오늘의 나보다 성장하고 싶다.
내년에는 이 어둠에 익숙해져 앞이 보이기 시작했으면 하고 바란다.
앞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이 아닌
확실한 앞을 보고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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