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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RD

#14 깍듯하다

 

Photo by JOSHUA COLEMAN on Unsplash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의 말이라면 그것이 옳든 부당하든 의심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늘 옳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12년 동안 어떤 선생님을 만나던지 모든 선생님들께는 배우고 존경할 점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참 재미있는 분이셨고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멋있는 분이셨고 수험생 시절 담임 선생님은 똑똑한 분으로 나도 나중에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 생각하게 한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전혀 존경할만하지 않으며 부당한 대우를 하셨던 분들이 많다.

11살 반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부부 생활을 물어본 선생님

반장은 남자가 해야 한다며 압도적인 투표수를 받은 여학생 대신 후보에 있던 남학생을 반장으로 임명한 선생님

자신이 애인과 다투었다며 기분이 좋지 않다고 종례를 두 시간 넘게 끝내주지 않은 선생님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버르장머리 없이 한 마디 해주고 싶은 선생님들이 참 많다.

아직도 교직에 계시려나.

 

그치만 당시의 나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선생님의 가르침이라면 의심 없이 껌뻑 죽는 학생이었고 여러 부당한 상황에도 별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이건 돌아볼 때마다 부끄러운 모습이다.

물론 그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한 어른들의 잘못이 더 크지만.

 

어찌되었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학생이었던 나는 그때 당시 '어른들에게 예의 있게 행동하기' 카테고리와 관련된 모든 행동을 열심히 지켰다.

그 중에는 인사 잘하기 이런 당연한 것들도 있었지만 어른 등 뒤로 지나가지 않기, 교실 앞문은 선생님이 사용하는 것이므로 학생들은 앞문 사용하지 않기 이런 것들도 있었다.

 

더불어 인사에 대해 배울 때 인사란 내가 상대방에게 나의 예의를 보여주는 행동이므로 어른이 나의 인사를 받아주거나 나에게 맞인사를 해주는 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배웠다. 

어른이라면 아이의 인사를 받고 굳이 대꾸하지 않아도 잘못된 게 아니라는 뉘앙스였다.

거의 최초에 교육 받은 '인사'란 나에게 저런 의미였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도 진심으로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살다보니 주변으로부터 상대방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며 열을 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듣고보니 기분이 나빠야하는게 맞는가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 철저하게 지킨 행동들은 나이가 들어도 습관적으로 몸에 베어있나보다.

나이 또는 직급으로 나보다 우위인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각을 살리게 된다.

의식하지 않는데 주변 사람들 눈에는 크게 보이나보다.

 

이 모든 생각은 내가 최근에 상사로부터 '보기와 다르게 깍듯하다'는 말을 들은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보통 윗사람들에게 대놓고 행동이 어떠하다 라는 말을 듣기 어려우니

나는 나의 행동이 '깍듯하다'로 비춰지고 있는 줄 몰랐다.

 

대학 시절 동기들과 서로 공채 진행 중인 기업들에 대해 이야기 하던 일이 기억난다.

그중 한 기업에 대해 이야기 하였는데 동기가 그 기업이 보수적이고 수직적이기로 유명한 기업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문화에서 회사 생활하기 어렵지 않겠냐 나를 걱정해주는 말인 줄 알았으나

동기는 '너한테 딱 어울리는 곳이네' 라고 했다.

장난치는 건 줄 알았는데 진지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동기도 나의 상사가 본 것과 동일한 모습을 본 것 같다.

 

그렇지만 사실 내가 부러워하는 유형은 윗사람들을 친근하게 대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대학시절 나는 교수님들에게도 매우 깍듯하였는데 나보다 한 학번 아래인 후배는 교수님과 장난도 치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차라리 과하게 예의를 차리고 깍듯하게 행동하는 것이 쉽다.

친근하게 행동하는 것은 눈치 빠른 사람들이 가능하다. 

상대방을 알고 늘 적절한 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타고난 눈치가 없어서 의식적으로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다.

그러나 없는 눈치는 많이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 애초에 그냥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오히려 과하게 굵은 선을 그어버리고 그 근처로는 접근도 하지 않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물론 친근한 사람과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겠지만 딱히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편도 아니라 괜찮다.

 

최근 '깍듯하다'라는 평을 듣고 나서 내가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상대방에 따라 나의 태도가 잘못 해석될 여지가 있는 점이다.

자칫 나의 태도를 보고선 본인이 갑이고 내가 을이라는 개념을 심어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내가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문화와 잘 맞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지만 그것이 맞는 말은 아니다.

나는 수직적인 문화를 싫어하며 꽤 자유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상대방에게 예의를 차리며 대우해주고 싶은 마음이지 나를 낮추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새 직장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많은 글들과 영상들을 보면서

이 사회에서 미성숙한 상대방을 만날 경우 나의 태도로 인해 내가 피곤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때문에 요새는 차라리 착하다 소리 듣는 것 보다 싸가지 없다 소리 듣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말이 많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나는 사회에서 얕잡아 볼 수 있는 면이 많은 시기이기 때문에 걱정이 될 수 밖에 없다.

비즈니스 드라마인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에서 상사가 사회초년생에게 이런 대사를 한다.

'가진게 많을 때는 감춰야 하고 가진게 없을 때는 과시해야 한다.' 

 

세상살이 자체가 정치 싸움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처럼 직장에서도 적당히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 있고 감추어야 할 모습이 있다.

상황에 따라 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감추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보니 가끔은 사무실에서 나혼자 발가벗고 있는 느낌이 든다.

괜히 머리 아픈 계산은 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 적당히 대우 받으며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방법은 일을 잘하는 것이다.

이제는 어린 시절처럼 일방적으로 배워야 하는 입장이 아니니까.

그저 실력이나 키워서 나만의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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