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생각 지워져 심장 소리는 커져
사랑이 참 쉬워져
그래서 빠지고 빠져 점점 너에게
최근 트와이스의 알콜 프리(Alcohol-Free)라는 곡을 즐겨 들었다.
재생 후 5초만 지나도 나의 몸은 이미 한여름 태양볕 그늘 아래 누워 시원한 바람에 머리칼을 맡기고 있다.
누가 들어도 '이 곡은 필시 여름에 들으시오.'라고 비트 사이사이에 새겨져 있는 셈인데도 불구하고 이제 그늘 밖에서도 시원한 바람 아니 차가운 바람을 맞는 계절에 뒤늦게 푹 빠져 들었다.
이 곡은 이제 막 사랑에 빠져 두둥실 들뜬 기분을 알딸딸하게 술에 취한 기분에 빗대어 표현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 곡의 가사를 압축하고 압축해서 딱 한 구절만 남겨보라고 한다면 나는 '사랑이 참 쉬워져'라는 가사를 남겨두고 싶다.
나는 이 가사에서 겉 잡을 수 없이 터지는 사랑이 느껴진다. 나에게 사랑은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도록 사랑은 어떤 감정인지, 그 감정을 증명할 수 있는 말 또는 행동들은 무엇인지, 사랑은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라고 하는데 열렬히 라 함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커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궁금했다.
고민을 거듭할 수록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하여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서 나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을 수도, 혹은 모두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이라는 단어를 글로 쓰지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사랑은 나에게 의미를 알지 못하는 외국어와 같았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이게 사랑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 순간이 찾아왔다.
만물에 무디고 남들에게 관심이 없는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오는 주말에 가족 여행을 가게 되었다며 자랑했던 사람에게 주말에 뭐하냐고 물어보는 사람이다.
이런 성격은 남들의 판단을 의식하지 않아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지만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꽤 서운한 성격일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않도록 노력 중이지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구구절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그 목소리는 멀어지고 내 머릿속 잡념들은 삼천포로 착실히 달려간다.
이런 나에게도 흥미를 유발 시키는 사람들이 몇명 있었다.
작게는 취미는 무엇인지, 즐겨 드는 음악 취향은 무엇인지, 어제저녁 메뉴는 무엇이었는지, 김치는 어떤 종류를 가장 좋아하는지에서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의 관계는 어땠는지까지 물어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처음으로 병원 천장을 바라봤던 그 순간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모조리 빠짐없이, 어떤 생략 없이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나에게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에게 무관심한 내가 그들에게로 가 한 마리의 물음표 살인마가 되었다.
그 사람들이 누가 봐도 인생이 궁금한,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왔을 법한 독특한 유형은 아니다.
활동 범위가 좁은 나와 마주칠 정도로 보통의 생활을 하며 누구나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들의 인생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알고 싶었고 내 앞에서 직접 떠들어주길 바랐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인생에서 몇 명 만나보니 문득 '어쩌면 이것이 사랑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든 내가 한시간이고 이박 삼일이고 경청하고 싶을 만큼 타인의 삶에 호기심이 생긴다는 것은 절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 가사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이 마치 술에 취하는 것과 같다면, 술에 취한 듯 평소의 내가 아니게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에게 사랑은 호기심의 또 다른 말이지 않을까.
여기까지 오는데 참 오래도 걸렸다.
나는 감정을 그 자체만으로는 느낄 수 없고 행동과 상황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감정을 파악하는 데에 남들보다 시간이 소요되긴 하지만 길어야 몇 분, 몇 시간이지 이렇게 몇 년씩 걸리진 않는데 말이다.
이렇듯 나에게 사랑은 어렵다. 사랑이라고 깨닫는 데까지 수년이 걸렸다.
사랑임을 깨닫는 것이 '쉬워진다'면 아마 그 사랑은 눈치 채지 못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무심코 지나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감정일 것이다.
내가 수년에 걸쳐 어렵게 돌아서 찾아간 멀고 먼 길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갈림길 속 놓아진 친절한 표지판이 최선의 지름길을 안내하고 해가 저물어도 길을 잃지 않도록 목적지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알콜 프리의 어떤 가사보다도 '사랑이 참 쉬워져'라는 가사를 들을 때 단숨에 사랑에 빠져드는 모습이 가장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렇게 어느 날 나는 '사랑은 호기심이다.'라고 정의 내렸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제야 나에게도 첫사랑이 생겼다.
그렇다고 사랑이 쉬워지진 않았다. 사랑은 호기심이지만 호기심은 여전히 호기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정을 판단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물론 앞으로 어떤 상황이나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수정할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굳이 나처럼 하나하나 따져가며 고민하고 땅땅땅 판결을 내리는 과정을 겪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보이는 사랑의 얼굴들이 있다.
나의 친구들 중 하나는 누군가 본인에게 사랑이 무어냐 물어본다면 추운 겨울날 손발이 얼도록 길거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순간이라고 답할 것이라 했다.
이 친구에게 사랑은 시간과 희생의 얼굴을 하고 있겠지.
나에게 사랑은 영원히 어려운 감정이겠지만 덕분에 트와이스의 알콜프리를 남들보다 감명 깊게 들을 수 있으니 또 다른 의미가 있겠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글도 알콜프리의 가사 한 줄로 시작된 글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알콜프리 근데 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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