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CORD

#18 지지 않기 위해 경기에서 도망쳤다

 

오늘의 정대만은 최상이다

 

 

※ 이 블로그의 모든 글이 그렇듯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슬램덩크라는 대인기 작품이 소재이다 보니 굳이 짚고 넘어갑니다.

 

 

요즘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화로 인해 만화 슬램덩크의 인기가 상당하다. 

나는 슬램덩크 세대도 아니고 만화책을 좋아하지도 않아 슬램덩크라고 하면 강백호라는 인물이 농구하는 만화라는 것만 알고 있다.  

쓰고 보니 만화책도 안 읽고 그 시절 세대도 아닌 내가 슬램덩크의 주인공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 슬램덩크 인기를 반증하는 셈이네.

그랬던 내가 최근 친구의 추천으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화를 보았고 슬램덩크라는 만화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좋았고 슬램덩크의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과유불급을 직접 보여주는 여운 있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캐릭터 하나하나의 개성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북산 외의 타 학교의 선수들까지도 매력이 넘친다. 

다양한 캐릭터들을 좋아하지만 그중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캐릭터는 정대만이다.

알고 보니 정대만은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30년 전부터 지금까지 유구히 인기순위 1위를 차지하는 캐릭터라고 한다.

 

정대만은 중학 시절 MVP 출신으로 농구를 매우 잘하는 미래를 촉망받는 선수였으나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연습 중 무릎 부상을 입어 잠시 농구를 접고 방황했던 캐릭터이다. 2년 만에 눈물의 고백(안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과 함께 북산 농구부에 다시 돌아와 없어서는 안 될 스타팅 멤버가 된다.

 

내가 정대만 캐릭터를 흥미롭게 보는 이유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가 추락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정대만은 당당하게 자신은 주연, 팀원들은 조연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본인의 농구 실력에 자신감이 넘쳤다. 

아마 농구선수로서의 본인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입학 얼마 후 부상을 입게 되고 조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복귀를 시도하다가 더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리하여 조연이라고 생각했던 동료들의 경기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역할이 되었다. 

자신은 늘 주연이었는데, 조연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밟고 있는 코트 위에도 서지 못하는 엑스트라가 된 것이다.

 

정대만은 그 2년 동안 농구는 부활동일 뿐이라고, 농구는 시시한 공놀이일 뿐이라고 되뇌며 농구를 깎아내렸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올려보아야 하고, 더 이상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본인이 무시했던 조연들보다 못하는 존재가 된 본인을 마주해야 하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존경하는 안현수 감독을 마주하자 더는 본인을 속일 수 없었고 그의 앞에서 농구를 하고 싶다는 진심 어린 고백을 하게 된다.

그리고 농구부에 복귀한다.

 

여담이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화에 정대만이 농구부에 복귀하면서 공식적으로 농구부원들에게 사과하는 장면이 나와서 좋았다. 

만화에서는 생략된 장면인데 이 장면이 영화에서 추가된 이유는 아마 송태섭이 영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송태섭에게 정대만의 존재는 농구와 이어진 마지막 실낱 같은 희망이라고 느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방황했던 과거를 인정하는 장면은 송태섭에게도 의미 있는 장면이었을 테다.

또한 본인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던 정대만이 농구부원들에게 깔끔하게 사과하는 모습에서 정대만의 성장이 엿보였다.

물론 농구부원들이 용서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명쯤은 정대만이 뻔뻔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눈물의 농구 사랑 고백을 보고 같은 농구 선수로서 스포츠맨 정신으로 쿨하게 용서했을까. 

어찌 되었든 그의 3점 슈팅이 북산의 복덩이임에는 틀림없다.

 

작가인 이노우에의 인터뷰를 보니 정대만이라는 캐릭터는 본래 농구부를 괴롭히는 악당1 정도로 끝내려고 했으나

농구부를 습격한 에피소드를 연재하던 중 마음이 바뀌어 다시 농구부로 복귀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정대만이야 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캐릭터라고 언급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를 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정대만 캐릭터가 가진 힘이고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정대만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앞으로 그가 마주하게 될 시련이다.

정대만을 멈추게 한 것은 방황을 가져온 무릎 부상이겠지만 앞으로 멈추지 않을 시련은 중학 MVP 시절의 본인일 것이다.

내가 2년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농구를 놓지 않았더라면,.. 후회의 끝에는 MVP를 거머쥐었던 빛나는 중학생 정대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 농구공을 잡고 코트에 서 있을 때마다 중학생 정대만과 싸워야 할 것이다.

추락했으니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위를 올려다보면 그때마다 MVP 정대만의 뒷모습이 보일 것이다. 

게다가 본래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기에 오늘 그리고 앞으로의 정대만은 과거이자 환상인 정대만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농구 코트를 떠나지 않는 이상 그 작은 중학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떨쳐낼 수 없는 환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농구공이 골대를 스치는 소리에 몇 번이고 되살아나는 자이다.

다시 일어나 환상 너머의 림을 향해 공을 던질 것이다. 깔끔한 3점 슛을.

농구를 좋아하는 이유가 오로지 농구일 뿐인 그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를 알고 나니 "불꽃남자"라는 별명을 들으면 한순간 활활 타오르는 불꽃보다는 힘을 잃어가더라도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의 모습이 연상된다. 

 

독자들은 본인 역시 정대만처럼 시련에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길 바라며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정대만은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가 된다. 

 

처음에 정대만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가 추락을 경험한 캐릭터였기 때문이었는데 계속 들여다보니 그에게서 내가 보였다.

알고 보니 나는 방황하는 정대만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늘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었고 1등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는 반드시 나는 놈이 있는 법이라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내 위를 날고 있는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었고 처참히 부서졌다.

아니 사실 나는 뛰는 놈이 아니라 기는 놈이 아니었을까. 

 

그런 순간들마다 나는 방황하는 정대만처럼 행동했다.

사실 나는 이거 별로 안 좋아해. 이거 별로 안 갖고 싶어. 이거에 욕심 없어. 스스로를 속여왔다.

그러면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버림받기가 두려워서 먼저 도망쳤다.

 

늘 그런 식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정대만은 인정하고 다시 농구를 시작했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다.

그래서 늘 아마추어에 머물렀다. 동네에서는 1등 할 수 있으니까.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프로들과 마주하여 내가 얼마나 평범한 사람이었는지 깨닫기가 무서웠다.

 

언제나 1등이 될 수 없는 것은 알고 있다. 80억 인구 중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을 리 없다.

그렇지만 나의 연약하고 작은 그릇은 지기 싫어서 욕심을 부정하고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이렇게 살면 원하던 대로 지는 일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내가 1등인 것도 아니더라. 동네의 1등은 그냥 동네 사람일 뿐이다.

평범해지기 싫어서 도망쳤는데 그 길의 도착지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길이 어리석은 길이라고 단정 짓지 못하는 건 내가 만약 안전지대를 벗어나 깨어지고 부서졌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모험과 손해보지 않는 안락함을 추구하는 삶.

잔잔한 호수 같은 인생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 인생은 나의 선택으로 채워진 호수였다.

도전과 무모함을 덜어내어 좌절, 시련과 함께 성공과 성장을 최소로 갖춘 인생.

 

틀린 삶인 걸까.

정말 틀린 삶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어느 곳에는 정답이 존재하는 걸까.

평행우주에 이곳보다 용기 있고 무모한 내가 있다면 이곳보다 멋진 모습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다신 일어서지 못해 주저앉아 땅만 바라보고 있을까.

 

진실로 추락한 것도 아니면서 혹시라도 추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평생을 방황하는 정대만으로 살고 있는 삶.

안 선생님 앞에서도 농구를 다시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해서 원래 플롯대로 다시 양아치 무리로 돌아가 평생 농구를 원망하며 사는 정대만이 내 모습인 걸까.

 

나는 내가 미처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 두렵다.

사랑하는 무언가, 누군가에게 용기를 내지 못하는 건 그 뒤에 펼쳐질 상황이 내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될까 봐.

다신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사실 인생의 모든 건 돌이킬 수 없는 것인데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용기를 내서 이야기하고 도전하고 성장하는지.

다들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박살 난 채로 울고 있었는지.

깨어진 조각들을 주워 담아 다시 엮고 있었는지.

 

용기와 욕심을 덜어내면 인생은 오히려 무거워진다.

그래서 어디로도 흐르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런 인생은 틀리다고 해야 할지, 저마다 다른 인생이므로 복수정답으로 인정해줘야 할지.

누군가는 나를 겁쟁이라고 부르겠지만 누군가는 나와 공감하고 있을 테다. 

 

정대만을 좋아하지만 그의 가장 짧은 순간에 살고 있는 나.

슬램덩크에는 인생이 있다던데 정말이더라. 내 인생도 있더라..

 

내가 이렇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슬램덩크에서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냐고 자주 물어본다.

다들 어떤 캐릭터를 가장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그에게서 본인의 모습을 보는지도.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 이대로 속아버린대도 괜찮다  (0) 2024.02.25
#17 신년계획  (0) 2021.12.18
#16 사랑이 참 쉬워져  (0) 2021.10.24
#15 늘 위로를 찾았던 자리에서 나는 버려졌다  (0) 2021.09.19
#14 깍듯하다  (0) 2021.02.12